법률상 원칙적으로 법인은 개인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독립적인 인격체로 인정된다. 특정 개인이 상속의 형태가 아닌 한 가족의 채무를 대신 이행할 의무를 부담하지 아니하듯, 특정 법인 역시 다른 법인의 채무를 대신 또는 연대하여 이행할 의무를 부담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우리 법은 이러한 법인격을 악용하는 경우 그 독립성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법인격 부인’이라는 법리를 통하여 책임을 부담시키는바 이에 대한 구체적인 판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구체적 사실관계=원고는 甲이 대표이사로 있는 주식회사 A로부터 물품 제작에 필요한 원재료를 공급해달라는 의뢰를 받아 A사에 원재료를 공급하였고 A사는 원고에게 물품대금 지급에 갈음하여 4억 5,000만 원 상당 약속어음을 교부하였다. 그러나 어음 지급기일에 지급이 거절되어 원고는 A사를 상대로 어음금 청구의 소를 제기하여 4억 5,000만 원 및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는 승소 판결을 받았다. 그런데 A사는 이미 소 제기 전 해산되고 甲이 청산인으로 선임되어 있던 상태였으며, 원고는 乙이 대표이사로 있는 주식회사 B(피고 회사)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원고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피고 회사의 설립일이 A사의 해산일과 근접하고, 乙은 명의상 대표에 불과할 뿐 甲이 실질적인 대표로 일을 하고 있으며, A사의 감사가 피고 회사의 사내이사로 되어 있고, A사와 피고 회사는 주소지와 전화번호 및 팩스번호가 동일하였다.
◇법원의 판단=이 사건 항소심 재판부는, ‘기존회사가 채무를 면탈할 목적으로 기업의 형태·내용이 실질적으로 동일한 신설회사를 설립하였다면, 신설회사 설립은 기존회사의 채무면탈이라는 위법한 목적 달성을 위하여 회사 제도를 남용한 것이므로, 기존회사의 채권자에게 위 두 회사가 별개의 법인격을 갖고 있음을 주장하는 것은 신의성실 원칙상 허용될 수 없다 할 것이어서 기존회사의 채권자는 위 두 회사 어느 쪽에 대하여서도 채무 이행을 청구할 수 있고, 이와 같은 법리는 어느 회사가 채무를 면탈할 목적으로 기업의 형태·내용이 실질적으로 동일한 이미 설립되어 있는 다른 회사를 이용한 경우에도 적용된다. 기존회사의 채무를 면탈할 의도로 다른 회사 법인격을 이용하였는지는 기존회사의 폐업 당시 경영 상태나 자산 상황, 기존회사에서 다른 회사로 유용된 자산의 유무와 정도, 기존회사에서 다른 회사로 이전된 자산이 있는 경우 정당한 대가가 지급되었는지 등 제반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하여야 한다’고 법인격 부인의 구체적인 기준을 설시했다.
그러면서 ① 피고 회사의 등기부상 대표이사인 乙은 A사의 공장장이었던 점, ② A사의 감사가 피고 회사의 사내이사로 등기되어있는 점, ③ 甲은 수사기관에 피고 회사가 자신이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회사라고 진술한 점, ④ A사와 피고 회사의 주소지가 동일하고 영업 목적이 일치하는 점, ⑤ 甲이 피고 회사의 대표, 乙이 피고 회사의 공장장으로 된 각 명함이 발견된 점, ⑥ 피고 회사 내부에 A사의 설비들을 보유하고 있던 점, ⑦ 피고 회사는 공장 부지 사용에 관하여 임대인과 별도의 임대차계약을 체결하지 아니한바 A사의 임대차계약에 근거하여 계속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점, ⑧ A사는 피고 회사에 설비 등 자산은 양수하면서도 채무는 여전히 남겨둔 점 등을 종합하여 볼 때 피고 회사의 설립은 A사의 원고에 대한 채무면탈이라는 위법한 목적 달성을 위하여 회사 제도를 남용한 것이므로 A사의 채무를 피고 회사가 함께 변제할 책임이 있다고 인정하였다.
한편, 피고 회사는 원고의 어음금지급청구권이 소멸시효 완성(3년)으로 소멸하였다고도 항변하였는데, 재판부는 ‘A사의 법인격 남용 여부가 이 사건 판결을 통하여 비로소 법률적 판단이 내려진 점을 고려하여 볼 때 원고로서는 이 사건 판결이 있기 전까지 A사에 대한 청구권과 동일한 권리가 피고 회사에 대하여도 존재하는지 여부를 객관적으로 알기 어렵고 이에 대하여 원고에게 과실이 있다고 보기도 어려운바 A사에 대한 어음금지급청구권이 성립한 때부터 피고 회사에 대한 청구권의 소멸시효도 곧바로 함께 진행된다고 보는 것은 형평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피고 회사에 대한 소멸시효는 이 사건 판결 선고일부터 진행된다고 판단하였다.
◇시사점=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법인격 부인 법리를 적용하여 신설회사에 기존회사의 채무 이행을 청구하기 위해서는 사실상 동일한 신설회사가 기존회사의 채무면탈이라는 위법한 목적 달성을 위하여 설립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면 된다.
특히 위 사건 판결은 신설회사와 기존회사의 등기부상 대표이사가 동일하지 아니함에도 불구하고 그 실질적 대표성을 각 회사의 동일성 판단 근거로 인정하는 등 영업 목적 및 주소지의 일치 여부, 설비 등 적극재산 및 임직원의 승계 여부, 제3자와의 다른 계약(예; 임대차계약)의 갱신 여부 등을 동일성 판단의 구체적인 근거로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포스트-코로나 시대 사업 부진 및 부채 과다로 인한 청산 또는 폐업이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는 추세인 바, 미수금을 보전 받지 못한 채권자로서는 예상치 못했던 채권 회수의 기회가 남아있을 수 있으므로 필요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미수 채권을 회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중기이코노미 객원=법무법인 청향 윤희창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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